[교양 인문]/나의 생각

라디오 신랑

농부십장생 2011. 3. 22. 18:21

라디오 신랑

 

이야기는 지금부터 사십년전 새마을 운동 한창이던 홍천군 서면 어유포리

팔봉산자락을 휘감아 흐르는 홍천강가의 시골 마을로 거슬러 올라간다.

벼농사와 담배농사를 짓고있던 우리집에서 길쌈을 하기 위해 뽕잎을 따서

누에를 키우던 시절의 이야기다. 라디오가 있기전 우리 집에는 바람벽에

스피커란 것이 달려 있었다.베니어 합판으로 사각형 모양을 만들고 앞면에

구멍을 숭숭 뚫어놓고 그안에 스피커를 고정시킨후 마을회관과 전선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때라 스피커에서는 매일 아침마다

국민체조음악새마을노래가 흘러 나왔던 것으로 기억된다.아마도 K본부

에서 하던 방송인것으로 알고 있지만 TV라디오도 보급되지 않았던 시

이라 스피커에서 나오는 방송을 듣는것이 유일한 낙(樂)이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후 아버지가 라디오를 하나 사 오셨는데 그때부터 라디오는

내것이 되다시피 하였다.뒷산 뽕나무밭에 어머니를 따라서 뽕따러 가는길에는

김없이 라디오를 가지고 갔었다.그때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던 마을선생님여자의일생 지금도 즐겨 부르는 애창곡이 된것도 라디오의 영향이라고 생각한다.지금은 돌아 가시고 안계신 어머니께서는 "저년의 지지배 이 다음에

라디오 신랑얻어 줘야 돼"라고 입 버릇처럼 말씀을 하곤 하셨다.

그리고 그후에 정말 라디오 신랑과 결혼을 하였다.신랑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전자회사(금성사)에 다니는 아담하고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라디오 신랑덕에 가전제품은 품질좋고 사용하기 편한 제품만을 골라서

십년이상씩 잘 사용할수 있었다.주변의 이웃들에게도 품질좋은 제품을

소개해주고 고장없이 잘 사용할수 있도록 자상하게 설명까지 해 주니까 

우리집을 부를때 아이들 이름보다 금성사집으로 더 불려진 것도 다

라디오 신랑 덕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에야 인터넷시대가 되었지만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것은 임국희

여상싸롱입니다.라디오 방송 초기에는 에이 엠(AM)으로만 방송하여 난청지역도 있고 잡음도 많았었지만 에프 엠(FM)으로 동시에 방송하므로 어느곳에서

든지 잡음도 없이 깨끗한 음질로 들을수 있어서 아주 편리해졌다.

라디오시대에는 연속극축구중계듣는 즐거움이 따로 있었다.

구수한 목소리의 성우와 실감나는 효과음으로 옥단춘 전 같은 연속극도,

말 빠르고 발음까지 정확한 유명한 아나운서월드컵 축구중계

"엄마 ! 나 챔피언 먹었어"의 권투중계처럼 듣는것 만으로도 실감을

해주곤 하였었다.라디오는 더 이상 우리생활에서 없어서는 안될

소금같은 존재가 되었어요.

앞으로도 우리들 삶의 희노애락을 함께하는 좋은 매체가 되기를 바랄께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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